후루이와 우티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에 의하여 구속받은 인간은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늘 부딪치는 실천적인 질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요일2:15-17)고 말씀했다.

그러나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본질적으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중립적이다. 단지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께서 정해준 가치가 있을 뿐이다.

선함과 악함은 바로 인간 안에서 생성된다. 인간이 피조물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가치에 따라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이는 세상으로 좇아온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이다.

어거스틴은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후루이’(frui)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을 ‘우티’(uti)라고 표현했다. 즉 후루이는 사랑의 대상이 곧 목적이 된다. 반면에 우티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목적이 따로 있다. 그러므로 후루이는 즐기는 것이고 우티는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하나님은 후루이가 되고 피조물은 우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수단을 목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것을 가치의 전도(顚倒)라고 한다. 가치의 전도가 바로 죄이다. 바로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하고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은 즐겨야 하고 세상은 사용해야 한다. 또 사람은 즐겨야 하고 세상은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사랑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용하고, 하나님을 장식품으로 둔다면 그것이 바로 죄이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어거스틴의 카리타스는 하나님을 후루이하고 세상을 우티하는 것이고, 쿠피디타스는 세상을 후루이하고 하나님을 우티하는 것을 말한다. 카리타스는 후루이와 우티의 대상이 구별되는 질서 있는 사랑이고, 쿠피디타스는 후루이와 우티의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 전도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의 질서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잘못은 이 투쟁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태도이다. 바로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삶을 말한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이 육신과 세상을 부정한다면 자가 당착적이고, 자기 정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선과 악의 실체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선과 악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다만 피조물 중에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다. 어거스틴은 이웃 사랑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는 어떤 구별과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후루이와 우티의 관계와는 조금 다르다. 하나님을 후루이하는 것처럼 인간도 후루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후루이를 우선순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후루이하는 가운데 인간을 후루이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대상이고 그에 비해 인간은 상대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후루이할 때 인간을 진정으로 후루이할 수 있는 것은 역설이다. 그럴 때 인간도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하나님과 인간은 경쟁의 대상이나 연적의 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는 아비나 어미 그리고 아들이나 딸, 또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역설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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