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한다
과거란 시간과 함께 지나가 버린 것이지만 어떤 경험은 너무도 어두워서 좀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면 계속하여 내상을 만들어 내어 고통이라는 중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 고통의 중증은 죄책과 수치심이다.
과거는 흘러간 것…과거를 묻지 마세요…아무리 소리치고 노래를 불러도 경험되어진 것은 흘러가지 않고 고이게 되어 썩는다. 썩으면 냄새를 풍겨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계속되는 내상은 결국 타인의 관계에까지 비화되어 외상으로까지 발전한다. 내상과 외상을 함께 입은 사람이 과연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기억된 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 상실증이나 정신분열증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파괴된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다. 그것은 죽음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그러기에 기억된 것은 천천히 흘려 보내야 한다. 그것을 잊는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시간이 묘약인 것은 사실이지만 흐르는 시간마저 역류하는 어두움의 경험은 악성이다. 그러기에 시간이 아닌 영원하심만이 그 악성을 치료할 수 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시25:7)라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에게 지난날의 죄와 허물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기억 속에 머물러서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우리야를 죽인 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시고 기억하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을 때 비로소 자신의 기억은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나 곧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5).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는 먼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피조물인 나의 문제는 곧 창조주인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묶어 두고 있는 그 어두움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부터 시작하자.
죄책이 내상이라면 수치와 치욕은 외상이다. 자존감에 상처를 받는 부당한 일을 당한 기억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약자이기 때문에 멸시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학대를 받거나, 폭행 당한 것들…그것들의 강도가 크거나 자신이 너무 연약할 때 그 시간은 흘러가지 않아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럴 때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여 다른 세계로 떠나감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상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그 기억은 흘러가고, 그에 따라 시간도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잊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사43:18). 이전 일과 옛적 일은 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 당한 온갖 쓰라린 경험들을 말한다.
또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사54:4). 우리가 미숙함으로 당한 수치와 연약함으로 당한 치욕도 잊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치유의 길이다.
그러나 정말 잊어야 할 것이 또 있다. 죄책과 수치심이 치유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겸손이라는 진주가 되어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승리와 성취의 경험은 교만이라는 큰 별을 만들기가 쉽다. 그 별은 빛나고 높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상한 빛을 낸다. 그 빛은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 그 빛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하는 것으로 피조물의 가장 큰 죄악이다. 그것의 끝은 파멸이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기적을 행하고,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성취를 잊어야 한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던 것과 변화산의 영광을 잊어야 했다. 우리도 지난날의 성공과 성취를 기억 속에서 흘려 보내야 한다. 단지 그것들은 하나님의 기억 속에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4)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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