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을 거둘 때

 

사람이나 동물이 죽는다고 할 때 그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동물에게는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인간만이 죽는다고 말한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숨이 끊어지거나 뇌파가 정지하는 때를 말하지 않고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에 대하여 의식하고 사색하기 시작하는 때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처럼 어떤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음의 상태가 계속 진행되는 시작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은 사방이 벽으로 쌓인 죽음의 공간에서 출구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진정한 구원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나름대로 출구를 찾는다.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함께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경험’도 하나의 출구일 것이다. 종교적 경험도 하나의 출구이고, 절망 끝에 찾는 것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리는 것도 출구이고, 자살하는 것도 그렇다.

때로는 끝없는 시간 속에 사는 것을 구원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하는 사람들의 추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축복을 위장한 저주인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먹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축복이 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까?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무녀 시벨은 제우스신에게 언제까지나 죽지 않고 살기를 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계속하여 새로워져야 하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죽지 않고 계속하여 늙고 또 늙어 결국은 참담한 모습의 괴물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새장에 가두고 구경거리로 삼았다. 그때 시벨의 부르짖음은 “제발 나로 죽게 해 달라”였다. 그 순간 무녀 시벨이 갈망한 구원은 죽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의 동편으로 추방하셨다. 그 추방은 곧 시간 속으로의 추방이다. 끝없는 시간이 영원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출구는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지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인간은 시간이고 하나님은 영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 만남의 장소는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다.

그 때부터 우리는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는 바울의 고백처럼 이중적인 신분을 갖게 된다. 이중성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고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점점 퇴락하고 무너지는 것과 점점 활기차고 새로워지는 것이 함께 있다면 둘 중에 누가 더 고통스러운 탄식을 할 것인가?

이 이중성의 극복은 우리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죽음은 신비스러운 미지의 영역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축복의 관문이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라고 말씀을 이었다.

재미없고 고독하여 내 안에 어디선가 죽음의 본능이 삶의 본능을 제압하고 올라올 때 어둠 속에서 빛을 구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바울은 장막을 벗고자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덧입고자 탄식한다고(고후5:4) 하지 않았는가? 그는 이어서 그러면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장막이 일시적인 것이기에 의미 없다고 말하지 말자. 차라리 경치 좋은 해변가에 장막을 치고 즐겁게 지내다가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갈 집이 있기에 장막의 불편함도 고통이 아니라 재미가 된다. 다만 너무 재미있어 돌아갈 집을 잊지는 말자.

그리고 장막 안에다 전기와 하수도를 가설하거나 냉장고와 에어컨을 설치하거나 침대를 들여놓을 생각은 하지도 말자. 짐은 간편할수록 좋다. 장막은 잠시만 치는 것이고 때가 되면 거두어야 하는 것이니까…

장막을 거두고 간단하게 짐을 꾸려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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