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갈대와 상한 갈대

 

어느 겨울에 소아시아를 여행하던 중 황량한 들판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 숲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

긴 그림자를 남기며 빨리 지는 겨울 태양에 금빛을 발하며 작은 바람에도 흔들거리는 갈대는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것도 수식어를 붙여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다. 무엇이든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룰 수는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말이다. 더구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연약함에다 변덕스러움까지 더하게 된다.

그런 갈대가 피어나는 곳은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들판이다. 바로 그곳을 광야라고 부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광야의 갈대에 관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광야에 나간 이유가 선지자를 보려는 것이었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간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마11:7). 갈대는 본래부터 외롭다.

세상적인 능력이 많아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에 거하는 사람도 못되고 그렇다고 영적인 능력이 많아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도 못되고 단지 모든 것을 생각만 할 수 있는 갈대는 스스로 외로움을 생산하고 그 외로움은 점점 더 짙어져 자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고 결국 그 몸은 병들게 된다. 그것을 상한 갈대라고 하자.

상한 갈대는 더 이상 바람을 타기도 하며 또 거스르기도 하면서 자신의 몸을 흔들 수가 없다. 상한 갈대는 언젠가 조금 거친 바람이 불면 꺾어질 운명에 놓여진다. 상한 갈대가 되어 꺾어져 썩어버린다면 생각하는 갈대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선지자 이사야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분을 소망으로 소개한다(마12:20). 그분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라고 이사야는 말한다. 그분은 너무도 조용히 다가오시기에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스트라스부르크의 詩를 생각한다. “이 피난처가 광야에 내버려져 있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사랑이 만들어지는 장소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밟혀진 길도 아니고 인간이 거하는 이 세상도 아니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폐허를 찾아다니느니, 그곳으로 가는 길은 거칠고 험난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 왕궁을 찾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력한 선지자가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서 이미 광야가 아닌 길에도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폐허로 남아 있어 아직 거칠고 험난한 광야를 찾아온다.

하나님의 피난처는, 생각하는 갈대로 시작했지만 이제 상한 갈대가 되어 힘겨운 생존을 하고 있는 황량한 폐허의 땅 광야에 내버려져 있다. 하나님의 피난처는 내버려져 있기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도 선지자도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피난처는 상한 갈대의 차지가 된다.

선지자 이사야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으로 소개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황량한 폐허인 광야에 내버려져 있는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세상의 권력자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왕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종교적인 지도자인 서기관이나 대제사장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거처도 없고 머리 둘 곳도 없었다.

그분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셨다.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분은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앞에 죄인으로 서야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은 왕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오른 손에 금홀 대신에 갈대를 드셨다(마27:29). 그분께서 손에 잡으신 그 갈대는 생각하는 갈대였을까? 상한 갈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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