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궁전의 메두사

 

지난 겨울 이스탄불의 지하 물궁전을 방문했을 때에 어두컴컴한 저수조의 한구석에 목이 잘린 메두사의 머리가 거대한 기둥에 짓눌려 있는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저주받은 메두사는 희랍인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고 그후 그 땅을 정복한 기독교인들에게 이방의 저주받은 우상으로 치부되어 물 속에 거꾸로 처박힌 메두사는 하나의 석상에 불과한데 왜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설정한 성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잔인한 저주를 내리고 또 정복자의 오만한 형벌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희랍 신화의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아테네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정사를 벌린 죄로 아테네에게 저주를 받아 괴물로 변하고 결국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죽은 메두사의 두상 중 하나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식수를 공급하던 거대한 저수조의 수많은 기둥 중 하나의 주춧돌이 되었다.

메두사와 신전에서 정사를 벌린 상대는 포세이돈인데 왜 그녀만 저주를 받은 것일까 하는 의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이야기(요8:1-11)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의문, 즉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는데 왜 여자만 잡혀 왔을까 하는 의문과 맥을 같이 한다.

희랍인들의 논리로는 아테네 신전을 더럽힌 것은 분명히 죄였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신이기에 저주와 처벌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신의 반열에 서지 못한 마녀 메두사만이 저주와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소위 트라시마쿠스의 정의란 강자의 것이라는 논리다.

유대인들에게 의(義)란 간음한 자를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율법이라는 계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여자만 잡아왔을 때, 그리고 그들 자신도 죄를 범하는 인간에 불과할 때 그들에게 계시의 권위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탈을 쓴 거짓 권위인 것이다.

강자들의 정의에 의해 타살 당한 수많은 무덤들이 있는 어두운 골짜기, 그리고 거짓된 권위 앞에 벌거벗기운 채 돌에 맞아 죽은 자들의 돌무덤들이 있는 곳이 바로 이 땅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간음하는 여인을 잡아온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사죄의 선언을 하셨다.

만약 메두사가 예수님 앞에 잡혀 왔다면 저주받아 괴물의 모습으로 목이 잘리고 거꾸로 기둥의 받침이 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천년의 세월을 물구덩이의 암흑 속에 처박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마녀라는 원죄의 운명적인 굴레마저 벗어버리고 그녀 본연의 아름다움을 더 크고 높게 승화시켰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고 말씀하셨다.

이스탄불의 지하 물궁전의 어둠 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측량할 수 없는 어둠 속의 우주와 기억할 수 없는 고향인 어머니 뱃속이었다. 또 떠오른 것은 고통 중의 욥이 부르짖던 사망의 캄캄함과 더 이상 갈 곳 없는 요나의 마지막 장소인 물고기 뱃속이었다.

그러나 그 모두는 결국 내 마음속으로 모아진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저주받은 메두사의 신음 소리가 있고 또 다른 쪽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으나 용서받은 여인이 있다. 용서받은 여인은 메두사에게 무언가 계속하여 말하고 있었다.

내 몸은 한 때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 벗겨진 채로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나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였다. 메두사, 너는 원래 아름다운 소녀였다. 네가 괴물이 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너의 마법 때문이다.

이제 그 어두움의 사슬을 끊고 출구를 찾아 환한 곳으로 나가자. 그 빛 가운데 너의 아름다움이 다시 소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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