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떡
예수께서 믿음과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 ‘다섯 개의 떡’과 ‘일곱 개의 떡’ 사건이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마16:9,10). 그러기에 제자들의 믿음과 깨달음을 위하여 광야의 떡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다섯 개의 떡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가 기술하고 있고 일곱 개의 떡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복음만이 기술하고 있다. 다섯 개의 떡 이야기는 다분히 유대적인 색조를 띠고 있고 일곱 개의 떡 이야기는 헬라적인 색조를 띠는 차이가 있을 뿐 두 사건은 그 본질에 있어서 같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광야다. 광야는 시냇물도, 샘물도 없는 곳이고 또 푸른 풀도 나무도 없는 곳이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밤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땅이 생명력을 소진케 하는 척박한 사막이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광야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이 세상을 상징한다.
그 광야에는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 유리하며 고생하고 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고, 쉴 그늘도 없고, 추위를 피할 곳도 없는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며 고통스러워하는 무리들은 바로 이 세상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을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사먹게 하라고 건의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마13:14-16).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그를 좇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뿐인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까’일까? 그렇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한끼 먹거리밖에 안 되는 떡 다섯 개 같이 작은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 앞에 조용히 가져오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다’(마13:19). 그래서 수천명의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겼다. 광야에서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유혹하였을 때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떡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배고픈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시면서, 그들 영혼의 양식이 바로 자신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예수님을 좇던 사람들 중 대부분도 이 떡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36)고 하셨다.
결국 예수께서 영적인 양식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들 중 대부분이 떠나 버렸다. 오늘의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의 사건을 통하여 나타내신 표적은 바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진리였다. 그의 육체가 바로 생명의 떡이었다.
십자가를 앞에 둔 마지막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신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바로 십자가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리기 위하여 때때로 성만찬 의식을 갖는다. 그것은 지성소 앞 성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거룩한 떡이다.
그러나 그 거룩한 떡상은 다시 어디에 차려져야 하는가? 그 상이 차려질 곳은 바로 광야, 곧 이 거룩하지 못한 세상이다. 그 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거룩한 제사장이나 제자들이 아니다. 바로 잃어버린 바 되어 세상을 유리하며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 상을 차릴 사람은 바로 오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 때 그들의 입에서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나이다”(시23:5)라는 다윗의 고백이 다시 나올 것이다. 예수께서 믿음과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다섯개의 떡’과 ‘일곱개의 떡’을 회상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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