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스더는 누구인가?

 

모르드개는 유대인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다왕 여고냐와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모르드개에게는 조카딸이 있었는데 어려서 부모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데려다 딸처럼 키웠다. 그가 바로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에스더이다.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삼촌 모르드개는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그 앞에 나가는 것은 불경으로 만약에 왕이 그에게 금홀을 내밀지 않으면 사형을 당하는 일이었다. 에스더는 고뇌 끝에 결단을 내리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모르드개의 요구와 에스더의 대답, 이 두 마디의 말은 성경 에스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모르드개의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해주며 또 그에 대한 개인적인 깨우침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개개인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져 갈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마땅히 깨달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모르드개의 냉철하고 지당한 판단과 말에 비해 에스더의 고뇌는 너무나 인간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드개의 모습보다는 에스더에게서 더 깊은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마땅히 깨달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은 더 이상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결단이다.

연약한 인간이지만 자신과 주위의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을 깨달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는 모르드개의 요구 앞에서 대답해야 하는 에스더들이다.

어두움의 자식이었고 죽음의 노예로 고통 속에 방황할 때,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또 자식처럼 양육해 주셨다. 그리고 왕후처럼 빛나고 풍성한 자리에 우리를 두셨다.

그러기에 현재의 우리 됨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인 것이다. 그 자리는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그분은 모르드개처럼 우리에게 죽음의 길을 요구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한다.

십자가에 죽는 것은 아비나 어미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죽는 것은 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공동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르드개의 말처럼 오늘의 자신됨은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리가 그 일을 위하여 사용된다면 영적인 기업에 참여하는 것이고 만약에 불순종한다면 그 기업을 잃어버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일은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12:16)고 말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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