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에서 누가 크냐를 쟁론한 제자들(막9:33-37)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9: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9: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변화산을 거쳐 가버나움으로 돌아와 사역의 근거지로 돌아와 머물고 있던 어느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집으로 돌아오는 노상에서 토론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을 그들에게 예고하셨지만, 깨달음이 없는 그들은 십자가에 역행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누가 크냐'는 주제를 놓고 쟁론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른 세 제자와 산 밑에 머물며 그들이 내려 오기를 기다린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하늘의 영과을 경험한 자들과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자들과의 영적 간격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간격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크냐'는 토론으로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한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그복할 수 없는 문제임에 틀림 없다.
이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인 것이다. 천국의 가치관이고 십자가의 본질을 깨달음에서 나오는 가치관이다.
그리고 실물 교육도 하셨다. 어린 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셨다. 그리고 말씀하겼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예로 들으신 것은 '누가 크냐'에 대한 논점을 갖지 않은 순진무구한 상태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 들이는 마음이며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 마음인 것이다.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본래성을 잃어 버린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속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창조 당시의 본래성을 회복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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