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소유에 대하여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다. 바로 눅22:35, 36절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22:35-36)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 중반에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여행을 보내신 적이 있다. 눅22:35-36의 내용은 그 때를 제자들에게 회상 시키시면서 그 때 주셨던 명령의 내용을 수정하시는 내용이다.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3,4)고 하셨다. 그 때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때에는 '전대와 주머니, 심지어 검까지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때와 이 때는 상황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문제의 요지는 이것이다. 눅22:35, 36절을 생각하면서 눅9:1-6절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막6:7-13의 본문 역시 누가복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같은 본문이 있는 마10:1-15 에서는 해석의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진다. 이 경우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눅9:1-6 의 해석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공관복음서의 본문은 모두 이 명령이 주어진 대상이 12 사도들로, 즉 사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를 좇는 제자들의 일반적인 삶의 원칙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전도의 임무와 함께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보내시면서 주신 명령이다. 그리고 누가와 마가복음에는 그 때 예수께서 사도들을 보내신 여행은 기한을 정해 놓은 한시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들이 경험했던 것들을 예수께 보고하였다(눅9:10).
전도 여행을 회상 시키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사명자의 삶'에 대한 경험을 통한 믿음의 확을 기대한 것이 틀림없다. 제자들의 대답 "없었나이다"는 그러한 경험적인 훈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을 갖게 되는 에수님의 기대가 충족되었음을 말해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심'에 대한 경험적인 확신이 요구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때를 모르지만 어떤 기간에는 소유없는 환경에 내 몰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급만을 받는 훈련의 기간이 있다. 그것을 훈련자즐이 인위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군들에게 그 점을 훈련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때를 제외하고는 '무소유'의 삶을 규정하시지 않으셨다. 필요하면 전대와 주머니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물론 소유 지향적인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필요한 것을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검까지 가지라고 하신다. 물론 검에 대한 해석은 또 다른 문제로 다양할 수 있다. 소유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것이지만 여기서 소유의 의미를 '필요한 순간에 공급 받는 것'과 구분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된 물질'이라는 정도로 정의해 두자.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목회자, 간사, 선교사 등을 포함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경험적인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평상적인 사역자의 물질의 태도는 미리 준비된, 또는 준비하는 소유의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즉각적인 공급하심'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비중과 빈도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의 경제적인 문제는 예수님 당시의 단순한 시대에 비하면 훨씬 복잡하여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그중에서도 사역자들. 특히 선교사들의 경제적인 삶의 형태에 대한 성서적인 원론적인 가치 해석과 그 적용은 확실해애 하고 신중해야 한다. '하나니의 공급하심'이라는 대원칙은 단순한 것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공급하심이 어떤 형태로 오늘날에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총리 요셉에게 칠년 흉년을 대비하여 칠년 풍년에 곡식을 저축하게 하셨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 날의 만나와 메추라기 만을 공급하셨지만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치를 미리 주시고 그것을 저축하게 하셨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 해의 곡식을 추수하게 하셨지만 그것을 저축하여 또 다른 일년을 살게 하셨다. 오늘을 위하여 거두는 것도 내일을 위하여 거두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사역자가 비상 사태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것, 자녀들의 학비를 적립하는 것, 은퇴 이후의 생활을 위하여 저축하는 것, 그것이 부동산이든, 저축이든, 보험이든 소유 지향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내일을 위한 하나님의 미리 공급하심이라는 가치에서 나온 것이라면 정당한 것이다. 다만 모두에게 덕이 되어야할 것이다. 아마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모양과 형태는 다양하게 표현될 것이다.
* 마태복음 10:1-15 에 들어 오면 해석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본문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 보다는 상대적으로 역사적 상황을 떠나 사도적 명령을 원리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15절 이하의 몇 가지 내용을 명령으로 추가하였다. 이 말은 사도들을 일시적으로 보내는 15절까지의 본문에서 시작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명령으로 원리화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도 이 명령의 대상은 일반 제자들(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사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 점은 마태복음에서 더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본문에 대한 해석은 여기서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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