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 대한 분노와 어리석음

 

옛날 옛적에 의가 별로 좋지 않은 형제가 살았다. 어느날 아버지가 재산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형이 놀부였는지 혼자 유산을 차지하고 동생에게 나눠 주지 않았다. 동생은 흥부처럼 성품이 착하지 않았는지 형의 불공평한 처사에 분노하였다.

그래도 집안 문제라 그 해결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권위 있는 선생님에게 부탁하면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동생은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왔다. 그는 예수님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눅12:13)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대 밖의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는 것이었다.

유산을 나누지 못한 동생의 분노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의 세상적인 분쟁을 조정하는 일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말씀하셨다. 유산을 동생에게 나눠주지 않은 형은 말할 것도 없고, 유산을 나눠 받지 못하여 분노하는 동생의 문제는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이다.

하나님은 물질이 없어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물질을 서로 나눌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가 아닌 사람들이 부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여 투쟁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소유의 넉넉함이 사람의 삶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유란 육신의 삶을 영위할 만큼이면 되기 때문이다. 소유에 대하여 상대적인 박탈감과 빈곤을 느껴 분노하는 사람들은 소유하려는 투쟁을 하며 인생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자족함을 배우며 인생을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써야 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을 소유하고 사람을 소유함으로 풍성해진다.

옛날 옛적에 부자가 살았다. 부자는 재물이 너무 많아서 쌓아둘 창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지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을 향하여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라고 독백을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고 말씀하셨다. 이상은 예수께서 소유한 자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의 말씀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사람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가 생각난다. 해가 뜰 때 출발하여 해가 질 때까지 밟고 돌아온 땅을 차지하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으로 이주한 빠흠이라는 사람이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넓은 땅을 밟고 돌아 왔는데 너무 힘을 소진해 죽고 말았다.

그래서 땅에 묻혔는데, 그가 묻힌 땅의 넓이는 한 평이 채 안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질이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유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현명한 자가 되는 것인가? 아마도 제일 현명한 자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쓸 만큼만 소유하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산술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우선 우리 인생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물질이란 좀과 동록이 쓸기도 하고 도둑질 당하기도 하여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 맡겨 놓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타서 쓰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자라게 맡겨도 필요한 만큼 내어 주시고, 많이 맡겨도 필요한 만큼만 내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설하신 은행의 지점들은 바로 물질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맡기면 하나님의 창고에 보관되는 것이다. 물질을 맡길 때 필요한 서류는 사랑이고, 찾을 때 필요한 서류는 믿음이다.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현명한 부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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