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행위로서 구제(마6:2-4)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제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게 명령하고 있는 곳은 신명기 14장, 15장이다. 14장은 십일조에 구제 용도가 있는 점을 말하고 있고 15장은 꾸어줌과 면제를 통하여 구제할 것을 말하고 있다.

14장 22절부터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는데 이는 여호와 앞에서 십일조를 드린 가족이 먹음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기 위함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14:23). 이것은 십일조의 본질이 하나님 경외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역할이 구제에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매 삼년마다 소산의 십일조를 성읍에 저축하여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신14:28,29). 그러니까 토지소산의 십일조 중의 삼분의 일, 토지소산의 3.3% 정도는 기업이 없는 자와 노동력이 없는 자들, 즉 생산 기반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15장 1절부터는 7년마다 꾸어준 것을 면제해 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11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에서 부족한 형제들에게 꾸어줌으로 구제하고, 그 꾸어준 것은 7년이 되는 해에는 면제해 주라고 명령한다. 꾸어줄 때는 악념이나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형제가 요구하는 대로 넉넉하게 꾸어 주라고 말씀한다. 기업이 있어 생산 활동을 하지만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빌려 주라는 것이다. 이자 등 이윤을 창출할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 서기 위하여 꾸어주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6절에서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의 행간을 보면 가난한 다른 나라에도 국가적으로 꾸어 주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는 15장 11절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빈곤은 영속적인 문제가 확실하고 그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의 구제 역시 영속적으로 수행해야 할 과업이 분명하다. 신명기 14장, 15장의 말씀은 자활 능력이 없는 절대 빈곤을 위한 구제와 자활을 위한 도움으로서의 구제의 두 가지 역할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제의 의미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적 행위로서 이해되고 있는 것을 초대 기독교 교회도 이어 받고 있음을 마태복음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마태는 유대 랍비들이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훈(디다케)으로서 세 가지 주제를 랍비이신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인 산상수훈에서 토라(마5:17-48), 예배(마6:1-34), 선행(마7:1-12)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마 6:1-18에서 하나님께 예배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강조 하면서 구제, 기도, 금식의 세 가지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듯 구제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일조의 규범에 내포되고 있으며 더 중요한 토라의 정신은 ‘의와 인과 신’이라고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강조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구제에 내포된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4)


초대 교회는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교회 내에 담당 사역자를 특별히 두었다(행6:1-6). 안디옥 교회는 천하가 흉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냄으로 교회의 일치를 보여 주었으며(행11:27-30) 사도 바울은 아가야와 마게도냐의 이방 교회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감으로 자신의 이방 사역의 열매로 확증을 삼았다(롬15:28). 복음 전도에 매진하던 사도들도 평소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생각하는 것을 힘썼다(갈2:10)는 점을 볼 수 있다.


만약 오늘날 십일조를 강조하는 지역 교회는 적어도 그것의 삼분의 일은 기업이 없는 자나 일을 하지 못하는 절대 빈곤자를 위한 구제에 써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기업이 있고 일을 하지만 생활 자금이나 사업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여유 자본을 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빌려 주는 정신은 옛날 토라의 정신처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가난한 나라를 위하여 국가간의 원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금융 체계는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을 위한 체계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정신을 오늘날의 체계와 구조에 반영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구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로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로 귀결되어야 완성된다”  그리고 구제 행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사람이 모르게 은밀히 행해져야 한다. 본문은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보이려고 광고를 하는 구제행위에 대하여 비판한다. 그것은 자기 의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위선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사랑하는 순수한 동기를 잃어 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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