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정리(행12:1-24)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12: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2: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2: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2: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2: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2: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2: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12: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9:32부터 시작한 이방인 전도에서 안디옥 이방 교회 설립에 이르는 대 단원의 막이 내릴 때가 되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와 히브리파 사역자들은 전면에서 퇴장하여야 할 때가 왔다.
이 일은 헤롯왕의 핍박 사건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헤롯왕은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기뻐하자 사도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
천사의 인도함을 따라 옥에서 탈출한 베드로는 형제들을 만나 안부를 전한 후 다른 곳으로 떠났다.
교회를 핍박한 헤롯왕도 충이 먹어 죽었다.
부조의 일을 마친 바나바와 사울은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사도행전이 설정한 무대의 주역이 예루살렘 교회와 베드로에서 안디옥 교회와 사울로 교체되는 순간이다.
*참고 /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대제와 미리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자 헤로디아의 친오빠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아그립바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배려 하에 칼리굴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치스럽고 허황된 생활을 누리며 살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로마에 사는 동안에 이미 황제 칼리굴라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는 아그립바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기 위하여 후에 총독(행정장관) 제도를 폐지하였다.
주후 37년 칼리굴라는 아그립바에게 3년전 시리아 속주에 병합되었던 필립의 영지를 주면서 왕이라는 직함을 수여하였다. 또한 칼리굴라는 이제까지 필립의 영지 북쪽에 인접한 별개의 분봉왕 영지였던 아빌레네(Abilene)도 그에게 주었다. 주후 40년에는 로마에 온 아그립바에게 이두매를 포함한 유대와 사마리아도 주어졌다. 주후 41년에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황제 자리에 올랐다. 아그립바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도 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헤롯 대제가 통치하던 지역 전체를 묶어서 아그립바의 통치 아래 두었다.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한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때 아그립바의 나이는 오십쯤 되었다.
아그립바는 파란만장하고 천박한 삶을 영위해 왔었고,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음모가 난무하는 투기(鬪技)에 해박하였으며 스스로 행하기도 하였었다. 그는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경건한 사람처럼 행세하여 겉으로 엄격한 바리새인들의 규례를 지키는 체 하였고, 칼리굴라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황금 사슬을 성전 금고에 바친 것을 비롯해 성전에 많은 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마치 유대교의 옹호자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가이사랴에서 투기 시합을 개최하기도 하고, 자신의 영토 밖에서는 부유한 헬레니즘적인 군주 같이 행세하여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아그립바는 왕국내 모든 계층과 분파에 경청할 줄 아는 군주로서 조부인 헤롯 대제보다는 백성의 복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유대인들도 아그립바를 본래 쓸모없는 난봉꾼으로 알았으나, 그가 왕위에 올라 겉으로나마 유대인 전통과 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이자 그를 지지하는 추세로 발전하였다.
그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 땅은 몇 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확장하고 다시 요새화 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 북쪽 지역에 여러 망대들을 갖춘 아주 튼튼한 새 성벽을 쌓아 성을 더 넓혀 놓았다. 이것이 이른바 제3성벽이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성되지 못하였다. 왕의 치세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시리아 총독 비비우스 마르수스(Vibius Marsus)에게 이 공사를 중단시키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잠시간의 평화도 아그립바의 갑작스런 죽음과 더불어 끝을 맺게 된다. 가이사랴에서 로마 황제를 기리는 축제 행사에 아그립바는 은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제왕의 격식과 위엄을 갖추어 공중 앞에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아그립바는 인간이 아니요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신이라는 아첨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아그립바는 이런 불경스런 아첨을 듣고서도 군중을 꾸짖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때 갑자기 아그립바는 격렬한 통증이 일어나 왕궁으로 실려 갔으며, 수 일 후에 죽고 말았다 (주후 44년, 사도행전 12:21-23 참조). 이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의 유족으로는 아그립바(2세)라고 불린 열 일곱 살 난 아들 하나와 세 명의 딸(베레니케, 미리얌, 드루실라)이 있었다. 아그립바가 채 7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죽자 (주후 38-44년), 로마는 다른 민족주의적 성향의 유대인 왕이 아그립바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할까봐 유대를 다시 총독령으로 돌려놓았다 (주후 44-66년). 아그립바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는 팔레스타인 북쪽의 작은 영토를 왕국으로 주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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