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화평이 아닌 검을 주셨다 / 마10:35-39
주님은 화평이 아닌 검을 주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4-39)
먼저 본문은 마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와 마11: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다시 말하면 열 두 사도를 보내시면서 명령을 하신 말씀 중에 본문이 속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에서 사도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중에 선택하여 권능과 사명을 주어서 보낸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따르던 제자들도 아니다. 사명을 위하여 선택하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그럼 오늘날 누가 그런 사람들로 이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야 하는가? 우선 예수님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정도의 사람들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일반 신자들도 아니다. 사명을 위하여 선택하심을 받고 그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정답인데... 오늘 날에 그런 사람들은 누구일까? 우선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참으로 오늘날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선택하셨는데 지금은 누가 선택한다는 말인가? 스스로 소명과 사명을 받았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말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점은 이 정도로 하고 미뤄 놓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그 일을 하려고 전적으로 나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교회 목회자들, 선교단체 간사들, 해외 선교사들을 말하는 것이 더 실제적일 것이다. 그리고 ‘명령’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명령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명령은 명령받는 자의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질문과 토론의 과정도 없다. 받는 자의 판단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냥 그대로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다. 화평이 아닌 검이란 갈등과 전쟁을 하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무엇에 대하여 갈등하고 전쟁을 하라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승리하여 쟁취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갈등과 전쟁의 대상과 내용, 그리고 쟁취해야 할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승리할 수 없을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할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 그러니까 집안 식구 간의 갈등과 전쟁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가족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갈등과 전쟁에서의 쟁취해야할 귀결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샬롬 즉 평화는 모두가 염원하던 것으로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거짓 평화로 규정하신 세상이 주는 평화, 즉 팍스 로마나이다. 로마제국에 굴복하고 그들이 정한 룰에 따르면 제한적으로 주던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굴복하여 충성을 표하고 세금과 부역을 하면 어느 정도 자치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족적 자존과 인간다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나쁜 상태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화평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샬롬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거짓 화평이 단어의 정의임이 분명하다. 이 거짓 화평도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것(good) 일 수 있고, 좋은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better)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the best)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막살이집은 나쁜 것이 아니다.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막아 주어 한 가족이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좋은 것이다. 어떤 오막살이집은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집 자체로는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기와집이 가장 좋은 것이라 가정하고 한 집터에 선택으로 주어진다면 가장 좋은 집을 위하여 더 좋은 집이나 좋은 집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포기할 수 있으려면 가장 좋은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할 때 다른 가족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현재의 좋은 상태라고 보이는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아마도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주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갈등이나 전쟁의 과정이 종결되면 모두가 진정한 화평의 실체를 비로소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명을 위하여 선택되어 보내심을 받은 자의 내면의 전쟁으로 귀결된다.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유치한 갈등과 반목의 수준으로 격하 시키지는 말자.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쟁은 죽음을 댓가로 지불하는 것이다. 검은 파괴를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잘못된 가치와 잘못된 질서를 파괴함으로 올바른 가치와 올바른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진정한 화평으로 표현될 것이다.
어거스틴은 죄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질은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이 순서를 바꾸어 물질을 사랑하고 사람은 사용하고 하나님을 장식품으로 놓는 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죄인 것이다. 대상이 가진 가치만큼 대해 주는 것이 질서인 것이다.
휴머니즘 그것은 좋은 것이다. 거기에 인간미가 있고 그러기에 매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휴머니즘의 완성은 가장 좋은 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에 연결되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때로는 가장 좋은 것을 구축하기 위하여 좋은 것을 파괴해야 한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 그러기에 일시적 아픔을 각오하고 좋은 것을 파괴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좋은 것도 파괴해야 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분노할 것이다.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거처럼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받고 사명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인가? 그러면서도 이 세대의 트랜드를 좇아 그것이 좋다고 외치거나 거짓 평화에 취하여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모든 것과 갈등을 일으키며 전쟁하는 동키호테 같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떤 거짓 평화를 파괴해야 하는가?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의 가장 큰 적이다”라는 경구를 어디에 적용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