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의 우선순위 / 마8:18-22

남전우 2010. 10. 20. 08:58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의 우선순위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8:18-22)

 

이 본문과 같은 내용은 눅9:57-62에 있다. 완전하게 같은 것은 아니고 마태복음에서 서기관으로 지명된 사람의 신분은 밝히지 않고 '혹이'라표현하고 있고 제자로 표현된 사람도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표현함으로 등장 인물 모두 신분을 생략하고 있다.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고한 사람 이외에 누가복음은 '가족을 작별하고 따르겠다'고 한 사람의 경우를 더 첨가하고 있다.

 

무엇 보다도 이 내용의 배경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복음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눅9:51-19:28)이 배경이다. 57절에 '길가실 때에'라는 표현이 단적으로 이 사실을 적시한다. 그 사건 뒤에 바로 70인을 세우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눅9:57-10:20이 바로 제자를 부르고 세우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에비해 마태복음의 배경은 마4:18부터 11:1까지로 예수님의 권세에 이은 제자들을 부르고 세우는 일과 교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4:18-25는 권세있는 말씀의 선포(5-7장)와 관련이 있고 에수님의 행동의 권세가 기록된 8, 9장의 초반 세개의 병고치는 기적(문둥병, 백부장의 하인 중풍병, 베드로의 장모 열병)에 뒤를 이어 부르심에 관한 기사가 바로 본문이다.

 

이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하여는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와 바로 앞에 기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앞에 세개의 병고침의 표적의 의미는 마태가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
라고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임을 밝히고 있다. 결국 문둥병자, 이방인, 여인이라는 세 가지의 대표적 취약 신분의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 이 예언의 조건을 만족 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아직 일반 은총을 넘어서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도 전 이해로서 중요하다.  창조의 본래성을 잃어 버린 상태의 인간의 곤고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인 것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좇겠다고 나선 서기관의 동기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서 벗어나서는 안될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서기관이라는 신분과 예수님이 거절했다는 결과를 가지고 동기가 여러모로 불순하다는 추론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적인 차원의 사역에 머므른 동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이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일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쏟으셨고 또 그들을 직접적으로 도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본질적인 것에 있다. 바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종말론적 성취를 하심으로 결국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이것은 다만 시간의 문제일분이고 또 구속적 사역으로부터 시작되는 결과일 것이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좇는 동기를 파악하시고 자신이 그런면에서 이 세상에 아무런 위치와 기반이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거절하셨다. 오늘날 역시 선하고 중요한 동기이지만 이런 동기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많고 또 이런 주장을 갖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성경 어디를 찾아 보아도 예수님은 이런 것으로 제자들을 부르시지는 않았다. 다만 제자의 삶의 표현에 이런 일들이 포함되고 있고,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로 관심을 갖고 베풀고 봉사해야할 내용인 것이다.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자신의 십자가의 구속을 전하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을 보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밝혀진다. 서기관 다음에 한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제자란 신분을 밝힌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서기관의 좇는 동기를 넘어서서 에수님의 사역을 위하여 좇는 자라는 말이다. 다만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는 요청이다. 부친을 장사한다는 말은 부친이 지금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부친을 봉양한다는 의미이다. 부친을 봉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신 효도의 덕목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은자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대답하셨다. 이 말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의 일을 위하여 따르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적인 일을 무시하거나 중요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너 아니더라도 세상에 많이 있기에 그들에게 그것을 맡기고 너는 삶의 우선순위를 예수님 자시을 따르며 그 일을 하는데 두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좇으면서 복음전파와 사회봉사의 일을 가지고 혼란스러운 논쟁은 무의미하다. 예수께서도 병자를 고치고, 소외된 자를 위로하시고, 가난한 자를 불쌍이 여기셨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격려하시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실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일에 헌신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우리도 그런 일을 격려하고 또 그런 일에 헌신한 사람들을 존경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도 평소에 그런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예수님이 자신의 본질적인 사역인 죄인을 구속하고, 구언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그일을 할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에게 오늘도 말씀하신다. '죽은자들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사역의 동기의 최우선 순위를 그 일에 둘 것이다.

 

* 8:23절부터 11:1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이 사실을 더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다음에 그것에 대하여 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