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성 애
우정과 연애 그리고 동성연애 / 남전우
남전우
2010. 10. 18. 21:22
성지향성(sexual orientation)과 성정체성(sexual identity)는 한 개인에게 속한 문제였다면 이제 연애는 한 개인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에 속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상대방에게 알려지지 않는 짝사랑이나 마음속에 감추어진 상태일지라도 어느 특정인이라는 대상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연애를 말하기 전에 우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사랑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 혈족 간의 사랑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나 이웃간의 사랑이 있고, 친구간의 사랑도 있고, 애완 동물에 대한 사랑도 있고 크게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도 있다. 그리고 이성간의 사랑도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의 질서는 이성간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성적인 요소가 없다(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나 동성애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간이라도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간에는 성적인 것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토론4-11)의 장속도라는 학생의 글에 '아름다운 동성애'도 있다는 내용이 있다. 나는 그 학생이 말하는 아름다운 동성애라는 의미가 동성간의 '성행위가 배제된' 연애관계 내지는 좀 유별난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정을 연애라고 하지는 않는다. 우정과 연애의 차이점은 우정은 '성(sex)'적인 요소가 배제된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독점적이지 않고 극단적 배타성을 띠지 않는다. 이성간의 우정도 연애로 변질되지 않는 그 순간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연애라는 것은 '성'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성행위'가 포함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행위'가 없더라도 인격적인 관계에서 관념상 상대방과의 '성'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은 '성'적인 관계의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말이다.
반면에 '성행위'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연애'라고 할 수도 없다. 상대방과 성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자신 안에 있는 성적인 욕구의 분출이라면 여전히 비인격적인 행위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자기 성적 욕구의 해소는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정과 연애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고 그 구분선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선을 넘나들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의지적으로 정리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용납될 수 없는 관계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성행위가 배제된 연애에 대하여는 제 삼자가 파악하기도 어렵고 또 간섭할 영역이 아닌 경우가 많다. 스스로의 내면적인 투쟁에 속할 경우가 많고 또 두 사람 관계에서의 투쟁일 경우도 많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기독교인의 가치는 '성'적인 것이(물론 성행위는 말할 것도 없다) 포함되어서는 안될 인격적인 관계들이 있다. 그것은 우선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이다. 그 다음 동성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와의 관계이다. 또한 혼인 외의 관계이다.
동성연애는 그것이 비록 '성행위'가 배제 된 경우일지라도 기독교적 가치에서는 인정도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동성연애'는 없다. 제 3자가 외적으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 실체를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성연애라는 것이 이미 '성'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동성간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그것은 우정일 것이다.
아마 이런 경우에는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 성지향성을 경험하고 고심하던 두 사람이 '성행위'가 배제된 교제 가운데 우정과 동성연애를 넘나드는 가운데 고통하며 투쟁하면서 그 관계를 동성 연애의 관계가 아닌 우정의 관계로 승화 시켜나간 경우에는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소설을 쓴다면 두 동성이 독신으로 우정의 관계를 지향하며 평생 독신으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고아들을 키우는 삶을 살았다면 아름다운 삶이라고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청소년기에 좀 특별한 우정의 관계에 들어가 혹시 동성연애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들어가거나 또는 '성행위'가 배제된 동성애적인 데에 빠졌던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래도 꽤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인 동성연애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 본격적인 동성연애는 거의 필연적으로 동성 성행위로 이어지기에 무척 워험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연애를 말하기 전에 우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사랑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 혈족 간의 사랑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나 이웃간의 사랑이 있고, 친구간의 사랑도 있고, 애완 동물에 대한 사랑도 있고 크게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도 있다. 그리고 이성간의 사랑도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의 질서는 이성간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성적인 요소가 없다(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나 동성애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간이라도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간에는 성적인 것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토론4-11)의 장속도라는 학생의 글에 '아름다운 동성애'도 있다는 내용이 있다. 나는 그 학생이 말하는 아름다운 동성애라는 의미가 동성간의 '성행위가 배제된' 연애관계 내지는 좀 유별난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정을 연애라고 하지는 않는다. 우정과 연애의 차이점은 우정은 '성(sex)'적인 요소가 배제된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독점적이지 않고 극단적 배타성을 띠지 않는다. 이성간의 우정도 연애로 변질되지 않는 그 순간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연애라는 것은 '성'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성행위'가 포함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성행위'가 없더라도 인격적인 관계에서 관념상 상대방과의 '성'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은 '성'적인 관계의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말이다.
반면에 '성행위'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연애'라고 할 수도 없다. 상대방과 성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자신 안에 있는 성적인 욕구의 분출이라면 여전히 비인격적인 행위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자기 성적 욕구의 해소는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정과 연애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고 그 구분선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선을 넘나들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의지적으로 정리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용납될 수 없는 관계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성행위가 배제된 연애에 대하여는 제 삼자가 파악하기도 어렵고 또 간섭할 영역이 아닌 경우가 많다. 스스로의 내면적인 투쟁에 속할 경우가 많고 또 두 사람 관계에서의 투쟁일 경우도 많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기독교인의 가치는 '성'적인 것이(물론 성행위는 말할 것도 없다) 포함되어서는 안될 인격적인 관계들이 있다. 그것은 우선 인간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이다. 그 다음 동성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와의 관계이다. 또한 혼인 외의 관계이다.
동성연애는 그것이 비록 '성행위'가 배제 된 경우일지라도 기독교적 가치에서는 인정도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동성연애'는 없다. 제 3자가 외적으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 실체를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성연애라는 것이 이미 '성'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동성간의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그것은 우정일 것이다.
아마 이런 경우에는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 성지향성을 경험하고 고심하던 두 사람이 '성행위'가 배제된 교제 가운데 우정과 동성연애를 넘나드는 가운데 고통하며 투쟁하면서 그 관계를 동성 연애의 관계가 아닌 우정의 관계로 승화 시켜나간 경우에는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소설을 쓴다면 두 동성이 독신으로 우정의 관계를 지향하며 평생 독신으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고아들을 키우는 삶을 살았다면 아름다운 삶이라고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청소년기에 좀 특별한 우정의 관계에 들어가 혹시 동성연애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들어가거나 또는 '성행위'가 배제된 동성애적인 데에 빠졌던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래도 꽤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인 동성연애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 본격적인 동성연애는 거의 필연적으로 동성 성행위로 이어지기에 무척 워험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