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행전

누가복음 24장을 묵상하다

남전우 2021. 11. 9. 10:52

누가복음 24장을 묵상하다

 

시작하면서

복음서가 단순한 전기적인 책이 아니라 각각이 의도성을 가진 메시지라는 이해는 중요하고, 또 현재 처한 상황에서 여전히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인식도 중요하다.

신약성서의 근 사분일의 분량이 되는 큰 책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난 해인 1950년경부터 신학자로서 누가가 이해되기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던 내가 18세 되던 해에 회심하고 처음 빠져든 책이 요한복음이었다. 단순무식한 신앙의 열정이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신비함과 형제간에 하나됨이라는 이상에 빠져들게 하였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유일한 규범은 너무 매력이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마가와 마태복음 공부에 몰입하다가 마지막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탐구하게 되었다. 지금도 누가의 메시지를 읽으며 궁리하고 있다. 궁리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의 메시지를 통하여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

어제와 오늘 누가복음의 마지막인 24장을 읽고 묵상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안식일이 지나 부활하셨다. 제일 먼저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이 여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23:55) 중의 일부였다. 누가복음만이 말하고 있는 갈릴리의 여자들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함께할 때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던 여러 여자들(8:1-4)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70인과 함께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르셨고 아마도 이와 비슷한 수의 여자들도 예루살렘으로 왔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이 되었을 것이다. 이 숫자들은 정확하게 계수하는 기계적인 숫자들이 아니다. 57 그리고 이 두 수를 더해서 생기는 12라는 수가 갖고 있는 상징이 중요한 것이다.

무덤에서 여자들이 만난 천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말하며 갈릴리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공히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한 예고를 세 번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누가복음만이 그 예고를 들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깨닫지 못한 이유가 숨긴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9:22, 9:44, 18:34).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2:38),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란 제자들(24:21), 그리고 후에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매인 사람(28:20)... 이스라엘의 민족적 소망을 넘어 온 인류의 구속으로 가는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셔야 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을 깨달아야 할 때가 제자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등으로 이름이 밝혀진 여자들은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 알렸지만 사도들은 그 말이 허탄하게 들려 믿지를 않았다고 한다.

사실 엠마오 길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여기까지만 써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사도행전이 반복하여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고 그 수가 많아지는(2:46, 6:7, 9:31, 12:24, 16:5, 19:20, 28:31) 꿈을 꾸며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과거의 부흥의 기억은 이제 예루살렘의 속량,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것으로 퇴행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안식일이 지나는 새벽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무덤가에 서성이는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 다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를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어두움이 걷히고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계시의 때가 이 새벽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

마가복음은 두 사람이 시골로 가는 길에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16:12)라고 한 문장으로 언급하는데 비해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두 제자 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사역을 설명한 누가만의 독특한 메시지이다. 그들이 가고자 했던 시골의 지명은 엠마오라고 밝히는데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60 스타디아(11.2km)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밝힌다.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는 것은 그동안 가졌던 꿈이 사라지고 안전까지 위협받은 상황에서 피난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에서 겪은 엄청난 사건을 이야기하며 가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동행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가의 말대로 부활한 예수님의 모양이 다르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누가는 다른 모양보다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 이제 그동안 숨겨졌던 메시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드러났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드러났는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밝혀 주어야 한다. 이전에 벳세다 소경의 눈을 뜨게 했고 또 여리고 소경의 눈을 밝혀준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이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였다. 자기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로 여기고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다. 그들의 꿈은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시체는 없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천사들을 보았다고 하는 허탄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 성경의 예언을 이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유하시며 식사 시간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벳세다 빈들에서 무리에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은 사건이 제자들의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9:20)에 이르게 한 것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 둘은 생명의 떡(6:35 )을 먹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비로소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깨달은 것이다.

오늘 아침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을 묵상하면서 누가의 메시지가 공관복음적 구조를 뼈대로 하지만 신학적인 면에서는 요한복음과 괘를 같이하는 면이 많음에 끌린다. 특히 숨겨진 계시가 때가 되어 드러나고 오실 성령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나는 다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떡을 먹는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간구한다. 그러면 능력으로 이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이다. 이제 곧 동이 틀 것을 기다리며...

 

갈릴리에서 에루살렘에 온 모든 제자들

오늘 새벽에는 누가복음 24장의 묵상의 마무리을 적어야 할 것 같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 예루살렘에는 열한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한자들이 모여 있었다(24:33). 이들은 예수님이 선택한 열두 사도(6:12-16 )들과 예수님과 그들을 물질로 봉사하던 여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길에 함께한 70(10:1) 등이었다. 이들 모두가 아마도 사도행전 1장의 120명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보이셨음도(24:12, 32) 언급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과 3라운드의 무대가 열렸다. 예수님께서 이들 모두가 모인 곳에 나타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 자신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그렇다 증인(마르투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셔서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을 읽을 때마다 이 내용이 기록되지 않앗다면 성령의 역사적 오심에 대하여 기독교 교리에 모호한 논쟁이 가중되었을 것 같은 개인적인 걱정이 들기도 한다. 조금 안심(?)은 요한복음 1416절부터 31절에 예수님이 자신이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제자들에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부활을 깨닫게 하시고 그 이후의 하나님 나라의 전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예수님은 베다니 근처에서 하늘로 승귀하셨다. “그들이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로 누가복음을 맺는다(24:52,53).

 

끝 맺으면서

이제 나에게 누가복음 24장은 어떻게 현재적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선 현실에 매몰되어 당면한 암울함에서 구원을 간구하며 시골로 피신하려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대속의 길을 생각해 본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에 얼마나 역행하는 미련한 것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무엇 보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야 함의 절실함을 느낀다. 이미 오셔서 내주하고 계신 성령이 충만해야 사망의 권세를 이긴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것이다. 나는 오늘 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