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본문 마25:14-30 일 잘하는 법

남전우 2014. 10. 18. 10:53

GMTC MT
2014년 10월 17일

본문 마25:14-30
일 잘하는 법

우선 소위 달란트 비유라고 불리는 본문에서 달란트는 재능이나 은사로 생각해 버리는데 달란트는 일단 화폐의 단위임을 인식하는데서 시작하자. 그리고 24장의 시간적 종말론적 가르침에 연속되는 의미론적 종말론적 비유의 가르침임을, 그리고 마태복음 만이 제시하는 25장의 세개의 비유 중의 하나이다. 앞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뒤의 것은 사람과의 관계라면 본문의 비유는 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것이다. 

마25:14은 어 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기는 내용으로 비유를 시작한다. 19절을 보면 오랜 후에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말씀(logos)을 나눈다. 종말론적인 비유니까 나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시고 시간이 다되어 내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15절은 주인이 각각의 재능대로 5, 2, 1 달란트를 나눠 주었다. 재능대로로 번역한 낱말의 헬라어는 dynamis 이다. 재능 보다는 '능력'이라고 번역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사람마다 타고난 능력이 다르다.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환경과 기회에 따라 그 계발 정도도 다르다. 물론 각각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도 다르다.

21절과 23절이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똑같은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의 크기가 아무리 많거나 적으나 상관없이 하나님에게는 작은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의 관심은 크고 작음에 집중되기 쉽다. 다른 사람의 크기와 비교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가 쉽다. 나 역시 너무나 많이 그런 투쟁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관점이 아니다. 그런 상대적인 비교의 투쟁을 접어두고. 하나님 앞에 나 홀로 서는 자리에 나와야 한다.
마24:21 과 23절입 똑같다는 것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종은 3종류가 아니라 2 종류라는 점을 마래 준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착한 은 헬라어 agathos로 좋은 이라는 의미가 더 좋은 것 같다. 충성된은 pistos 로 신실한 정도가 좋을 것같다. 착하다는 것을 도덕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주인에게 좋은 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상대적으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헬라어는 poveros와 okneros 인데, 사실 이 종은 인간의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주인의 것을 떼어 먹거나 자기 맘대로 사용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 주인에게 좋은 종과 대착하여 나쁜 종인 것이다. 
문제의 핵심과 촟점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판단에 있다. 나는 많은 경우 도덕적 관점과 가치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착한 종인가 악한 종인가를 생각하곤 했다. 문제는 내가 선한 인간인가 아닌가 보다 하나님에게 좋은 종인가 나쁜 종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과연 좋은 종인가?
악한 종이나 나쁜 종이라는 구분은 종들이 자기 주인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으며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서 비롯된다. 24절에 나쁜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다고 말했다. 굳은은 헬라어로 skelelos 인데 개역개정 번역처럼 문자적으로 딱딱한이라는 뜻으로 인격에 적용할 때는 빈틈없이 엄격한 사람을 가리킨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존재는,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존재는 능력이 아주 커서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결국 이 비유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거룩하고 전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거룩하고 전능한 하나님이기에 죄인이고 연약한 인간은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나쁜 종은 주인은 정확하고 엄격한 사람이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기에 주인이 두려웠고 그러기 때문에 잘못하다가 주인이 자기에게 맡기 큰돈을 잘못하다가 잃어버리거나 손해를 입게 되면 큰일이기에 땅에다 안전하게 잘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거룩하고 전능함은 하나님의 속성이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거룩하지만 죄인인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고, 또 전능하지만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으로 인간의 연약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거나 왜곡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아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고 또 자신을 거룩함으로 옷 입히시며, 자기의 연약함 가운데서 능력을 덧입으면서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을 기뻐하심을 알게 된다.  주인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 나쁜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27절은 나쁜 종에게 주인이 대답한 내용이다. 나쁜 종은 게으르다. 게으르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미적 거리는 것이다. 나쁜 종은 아무 것도 안하고 땅에 주인이 준 달란트를 묻어 두었으니까 게으른 것이 일단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본문에서 게으르다는 의미는 더 밝혀 보아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보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인이 종들에게 밭에 가서 김을 매라고 했는데 어떤 종이 새벽부터 산에 가서 죽을힘을 다해서 밤늦게까지 나무를 해왔다고 하면 이 종은 주인에게 부지런한 종일까 아니면 게으른 종일까? 종의 입장에서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주인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인은 과연 이런 종을 칭찬할까? 주인의 뜻을 모르고 행한 수고는 소용없는 것으로 주인에게 게으르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다. 주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주인의 뜻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수고하며 일할 것을 결코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능력에 맞게 일을 주시고, 그 일을 신실하게 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심대로, 우리의 뜻대로 일을 계획하고 그 일에 매진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따르지 않은 일을 하였다면 나는 나쁜 종이고 게으른 종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해답이다.
오늘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종말의 날이라면 나는 오늘 착하고 충성된 종일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일까? 아직 그 날이 아니기에 기회가 있다.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성령의 조명하심에 힘입어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반적인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각에게 주시는 고유한 일들이 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그 때 그 때 말씀하실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렇게 인도하심을 받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해서 알지 못했을지라도 늘 깨어 살았다면 그 인도하심을 놓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