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갈대, 생각하는 갈대

우정을 생각하며

남전우 2012. 4. 26. 05:43

 

우정을 생각하며

 

내 나이 사십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동안 소식이 없던 옛날 친구들로부터 심심지 않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 한번 만나자거나 동창회를 새로 시작했는데 참석해 달라는 제안을 한다.

예전 같으면 시큰둥했겠지만 지금은 왠지 그러한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것은 나 자신이 겪고 있는 사추기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동안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여러 친구들로부터 한꺼번에 연락이 오기 시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인생의 때가 된 것이다. 자기 성취에 몰두하던 시절도 지나고 연애하고 가정을 이루는 본능적인 열정의 시절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생의 중반기를 넘기면서 젊은 시절에 추구했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하여 의미를 상실하고 많은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랑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생존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초월적인 사랑인 우정의 귀함을 비로소 알게 된다. 거기에다 그리움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느낀 또 하나의 의문은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동창들에게서만 연락이 오고 중학교 동창들로부터는 연락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동창회와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은 많지만 중학교 동창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에 비해 중학교 때 맺은 친구들은 적은 것 같다.

그것은 인간에게 우정이 만들어질 수 있는 제한된 기회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우정이 싹트고 풍성하게 자랄 수 있는 밭은 자기를 숨김없이 드러내 놓아 자기 감정에 충실한 토양이어야 한다. 천진무구한 어린 시절이 바로 초등학교 때이다.

그리고 또 다른 풍성한 우정의 밭은 현실에 구애를 받지 않고 꿈꾸는 이상과 순수한 가치를 추구하는 토양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수준을 가질 수 있고 또 순수성을 잃지 않는 마지막 시기가 바로 고등학교 시절이다. 중학교 시절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로 우정을 이루는데 썩 좋은 토양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정은 무엇인가? 우정은 에로스의 한 영역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상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사랑이 갖는 배타성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다. 우정은 대상에 있어서 제한된 소수인 점은 애정과 마찬가지이지만, 생성에 있어서는 애정이 생득적인 것에 비하여 의지적인 것으로 구별된다.

그러기에 우정은 삶을 영위해 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정이 없이도 그런 대로 잘 살아간다. 그러나 우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사랑의 영역을 다 알지 못하여 마치 푸른 초원의 풍성함이 없는 메마른 광야의 삶과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정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찾으려고 할 때는 너무 늦은 때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정을 생성하고 키울 수 있는 밭을 상실해 버린 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의 친구들을 다시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옛날에 씨를 뿌린 밭을 돌보지 않다가 오랜 후에 다시 찾아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희랍인이나 동양인이나 고대 철인들에게 우정은 남녀간의 사랑보다도 우선하는 덕목이었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우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220이라는 수와 284라는 수의 관계가 바로 우정이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220의 모든 약수들의 합이 284이고 284의 약수들의 합이 220이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있는 요소들을 합하면 바로 상대방이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정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대방에 투영하고 상대방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는 관계이다. 그것은 우정의 가치를 말한다. 그러기에 꼭 언어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우정이라고 했다. 이는 우정의 감정을 잘 표현한 말이다.

다윗은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고 친구 요나단을 추모하였다(삼하1:26). 우정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승화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