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갈대, 생각하는 갈대

빼재르브르그 하늘에서

남전우 2012. 4. 9. 05:07

빼재르브르그 하늘에서

 

서울에서 유럽으로 가는 항로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러시아의 제2의 도시인 뻬째르부르그의 상공을 지난다. 뻬째르부르그는 영어로는 피터스버그이고 우리말로 한다면 베드로市쯤 된다.

러시아가 공산화되어 한동안 러시아 공산 혁명의 아버지인 레닌을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가 공산주의가 몰락하자 다시 원 이름을 찾았다. 베드로와 레닌의 싸움, 즉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싸움을 상징하는 느낌이 든다.

뻬째르부르그의 상공을 지나면서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바로 뻬째르부르그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무대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의 서구 유럽의 무신론적 허무주의가 러시아로 밀려들어올 때 그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대지’와 ‘민중’이 구원의 길임을 역설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 ‘죄와 벌’ 그리고 ‘백치’의 무대가 바로 이 도시이다. 한마디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뻬째르부르그는 인간의 삶의 현장인 이 세상이다.

‘죄와 벌’의 명민한 주인공의 이름은 라스꼴리니꼬프이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논리를 추종하는 무신론자인 주인공은 그 논리를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세상에서 백해무익하다고 여기는 전당포 주인 노파를 살해한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노파를 살해한 것은 벌레 한 마리를 죽인 것 정도밖에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논리와 상관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소리인 죄책감이다. 죄인으로 전락하여 방황하는 주인공의 죄를 잡아내려는 뱀처럼 냉철한 민완 형사의 시도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바로 그의 죄를 찾아내고,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창녀인 쏘냐였다. 그녀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 가난하고, 더럽고, 비천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순결한 영혼을 소유한 쏘냐의 순수한 사랑은 이 무신론자가 죄를 고백하게 한다. 그래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삶의 터전인 뻬째르부르그를 떠나 유형지 시베리아로 떠난다.

‘죄와 벌’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시베리아행 열차를 타고 뻬째르부르그를 떠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백치’의 첫 장면은 11월의 어느날 뻬째르부르그를 향한 열차 안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백치’는 ‘죄와 벌’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바로 무신론자가 죄를 고백하고 뻬째르부르그를 떠나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고 뻬째르부르그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똑똑했던 무신론자 라스꼴리니꼬프는 세상 사람들이 바보로 여기는 백치 므이시킨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한 여인 쏘냐에 필적할 만한 바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바보일 뿐 아니라 2년 동안이나 외국에서 투병생활을 하였지만 완쾌되지도 못하였다. 뻬째르부르그에 돌아온 백치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 말미암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또 결과를 맺는다는 점이다. 백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서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바로 어린 소년이 숲 속에서 들은 이리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그는 “허무주의가 출현한 것은 우리 모두가 허무주의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에다 “단지 허무주의가 창조적인 자세를 지니고 나타났기에 우리를 놀라게 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이리가 득실거리고 있다. 우리는 이리의 울부짖음 가운데 살고 있다. 오늘의 이리들은 너무나 창조적이어서 양의 탈을 쓰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위장된 그 노래는 이리의 울부짖음일 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하신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마10:16).

세상을 떠나 세례를 받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바로 지혜와 순결의 성민이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쏘냐는 뱀처럼 지혜로운 라스꼴리니꼬프를 다시 순결한 므이시킨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