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의 삶
장막의 삶
잠언의 말씀 중에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잠14:11)는 구절이 있다. 어째서 악한 자에게는 집이고 정직한 자에게는 장막인가? 지혜자가 집과 장막으로 구별해 언급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 생각된다.
집은 크고 튼튼하여 오래도록 거주하는 공간이다. 물론 오막살이집도 있지만 장막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장막은 작고 약해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악한 자가 사는 공간이 집인 것은 그의 삶이 이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다. 그래서 크고 멋있는 집을 지어 갖가지 좋은 것들로 채우고 그것에 취해서 사는 것이다.
지혜자는 이어서 말하기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고 말하였다. 슬픔으로 이어지는 웃음과 근심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이 그의 삶의 본질로 어느 날 그것마저 무너지게 되어있다.
이 세상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에게는 사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집과 달리 장막은 일시적인 거주를 위하여 치는 것으로 언제든지 떠날 때가 되면 훌쩍 거두면 된다. 목초지를 찾아 자주 이동을 하여야 하는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가 장막이다. 장막을 치는 사람들은 그곳이 영속적으로 거할 곳이 아니기에 장소에 애착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은 일시적으로 장막을 칠 장소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 가나안에서의 그의 삶의 공간은 장막이었다(창13:3, 18:1).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마다 쉽게 장막을 거두어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집을 떠난 조카 롯은 장막 대신 소돔성을 택해 집에서 살았다. 타락한 도시 소돔성이 멸망할 때 롯의 집은 함께 불타 버렸다. 간신히 멸망에서 건짐을 받은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으로 도망하여 굴속에서 살았다. 그 굴에서 그들은 자손을 만들기 위하여 부도덕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이 살던 굴은 집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장막에 가까운 것인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에 거하였다(출14:9, 민11:10).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던 성전도 장막이었다(출39:38). 집도 성전도 장막인 것은 그들이 집과 성전을 지을 곳이 광야가 아니고 약속의 땅 가나안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토담집에 살았었다. 토담집이라도 광야의 장막보다는 튼튼하여 아늑하고 편했을 것이다. 그러한 집을 버리고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고생하는 이유는 애굽이 그들의 땅이 아니고 바로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떠나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땅으로 가기 위하여 광야에 장막을 치고 거두고 한다.
장막으로 된 성전을 성막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일 뿐이다(히9:23). 솔로몬이 집으로 된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지만 그것 역시 그림자였을 뿐이다.
광야의 성막보다도 더 종교적으로 타락해 버린 장소가 그 성전이었다. 이러한 성전이나 성막이 아닌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장막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졌다(히9:1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고후5:1). 이 세상에서의 우리 육신의 삶이 바로 장막에서의 삶이다.
또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말씀하였다. 즉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을 모시는 성막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이 세상은 정착할 수 없는 땅으로 지나가는 광야와 같다. 우리가 정착할 곳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하늘의 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히11:13).
나그네는 소유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없다. 나그네는 불편을 감수한다. 나그네는 한 장소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나그네는 타지 사람들에게 지나친 집착을 갖지 않는다. 나그네는 항상 목적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고 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