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도 유업을 나눌 수 있는가?
종도 유업을 나눌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선택하여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운명적으로 주어진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음을 깨달을 때까지는 그것을 운명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다면 행운으로 여기겠지만, 만약에 온갖 부정적인 것들만 주어졌다면 그것은 일생동안 벗어버리기 어려운 굴레가 된다. 주어진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결코 그 운명적인 굴레를 스스로 벗어버릴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난 가정이 경제적으로 너무 빈곤한 것도 아이에게는 고통의 굴레가 된다. 폭군과 같은 부모 밑에 태어났다면 더 큰 고통의 굴레다. 주어진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평하다면 그것도 크게 고통을 주는 굴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굴레는 자신에게 있다.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죄와 연약함이다. 인간은 죄와 연약함의 종으로 태어난다.
신분이 종인 것은 부모가 종이기 때문으로 운명적으로 주어진다. 그 신분을 바꿀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종의 신분을 갖고 살아야 한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이고 연약함의 종이다.
죽을 때까지 그 굴레를 완전히 벗어버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왕처럼 다스릴 수도 자식처럼 소유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투쟁의 시작은 자신의 신분이 종임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그럴 때 인생의 가장 큰 진실함과 아름다움인 낮아짐과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신분임을 인식하는 것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럴 때 죄와 연약함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신분이 이적된다. 여전히 신분은 종이지만, 그 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시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종에게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굴레를 벗고, 자신과 환경을 다스리고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아침에 묵상한 잠언의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잠17:2).
주인에게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는 종도 있고 또 주인의 유업을 나눠 얻는 종도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바로 내가 투쟁해 오던 운명적인 굴레를 벗어버리는 길임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찾아 왔다.
얼마나 많이 ‘그래, 나는 아무 것도 다스릴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종이다’라는 체념에 좌절과 절망 그리고 무기력함 속에 나를 던져 넣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죄와 연약함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 그 운명적인 굴레를 벗어 버려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비로소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고, 주인의 유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단지 하나의 조건은 ‘슬기로운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의 슬기로움이란 무엇일까? 우선은 자신의 신분이 종임을 잊거나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만을 경계하고 언제나 겸손하게 한다. 그런 종은 다른 사람과 다툼을 피하고 화목을 도모하는 자가 된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거나 불행 당한 자를 보고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거나 분에 넘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침착하게 한다. 남의 허물을 덮어 준다. 미련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피한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친구를 사귄다. 위급할 때 서로 돕는 형제가 있다. 하나님께 연단 받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마음은 상황에 상관없이 즐겁다. 잠언 17장 말씀에서 묵상한 것들이다.
그러고 나니 나는 슬기로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종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또 한심한 생각이 든다. 죄와 연약함의 굴레는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포기하면서 한 세상 살고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다스리고, 유업에 참여할 기회를 살려야 한다. 바로 슬기로움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