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갈대, 생각하는 갈대

꿈은 애굽으로 인도하는가?

남전우 2012. 4. 3. 05:53

 

 

꿈은 애굽으로 인도하는가?

 

오래 전에 어떤 모임에서 자주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의 꿈에는 늘 예수님이 환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한다. 그런 꿈을 꾸는 그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꿈을 잘 꾸지는 않지만 꿈을 꾸었다 하면 대개 출구 없는 곳에서 방황하다가 그 순간 잠에서 깨는 악몽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무의식의 세계가 짙은 회색임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정신 세계는 더 많은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정화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마5:8)가 되고 싶다. 그 사람이 하도 자주 꿈 이야기를 해서 한번은 그에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에는 강아지가 손을 흔들어 준다”라고 농담을 했다. 그후 그는 더 이상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의 꿈은 대개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개꿈일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꿈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간 두 사람이 있다. 구약성서의 요셉과 신약성서의 요셉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애굽은 두 사람 요셉의 고향이 아니며 더구나 스스로 택하여 갈만한 매력적인 곳도 아니다. 그러기에 두 사람 요셉은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피난처이며 또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는 기다림의 장소다.

구약의 꿈쟁이 요셉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다른 형제들의 단들이 자기 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다(창37장). 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그가 후일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 서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꿈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어린 나이의 요셉은 고통 가운데 애굽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애굽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기근을 피해 생육하고 번성할 피난처였다. 또 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때를 기다리는 장소였다.

신약의 꿈쟁이 요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이다(마1장). 그는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잉태하자 관계를 조용히 끊고자 하였다.

그 때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그후 아기 예수를 해하려는 헤롯의 음모도 꿈을 통하여 알게 되고 또 애굽으로 피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요셉은 헤롯이 죽기까지 오랜 동안 애굽에서 살아야 했다. 그가 애굽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을 리 없었고 또 고향이 아닌 애굽에서의 피난 생활은 어렵고 고달팠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애굽은 아기 예수를 보호할 피난처였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기다리며 사는 장소였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영적 공동체를 이끌어 내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하고 돌보는 임무가 요셉에게 있었다.

우리가 꿈을 가졌다고 할 때 그 꿈의 정서는 일반적으로 환상적인 파스텔 톤의 색조를 띠고 있다. 그 맛은 감미롭다. 그러나 그 꿈이 인도하는 현실은 짙은 어두움의 색조를 띠고 그 맛은 쓰디쓰다. 그 꿈은 바로 애굽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게 한다.

그러나 꿈속에 머문다는 것은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도취하여 일생을 살아간 나르시스의 후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소명도 기업도 없이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자는 베드로의 환상만이 있다.

천국의 꿈을 꾸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두움이 짙은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에 고난의 장소로 외로운 곳이다. 그러나 요셉의 자손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것처럼,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 것처럼 우리의 꿈길은 정녕 천국으로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