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된 병자가 찾은 안식
38년 된 병자가 찾은 안식
38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아이에게는 적색 38번 버스를 타면 집으로 올 수 있다는 생각이 전부일 것이다. 고향이 북한인 사람들에게는 한 맺힌 38선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노름꾼은 38따라지가 나오면 싫어하고 38광땡을 잡으면 좋아할 것이다.
나이가 38살 된 사람은 지난 38년의 삶을 생각할까? 38세에 죽은 사람은 짧지만 살만큼 살은 것인가? 그런데 38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
성경에는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있다(요5장). 그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예루살렘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였다. 그 때 먼저 들어간 자는 어떤 병이든 낫게 되었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그 동안 물은 여러 번 동했겠지만 아무도 그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38년 동안이나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는 병자였다. 그래서 그는 병자들의 세계에서도 낙오자였다.
어느 안식일 날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하셨다. 고침을 받은 병자는 곧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를 본 유대인들은 고침을 받은 병자에게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38년 동안 자리를 깔고 누워 있던 사람보다 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 있는가? 있으면 나와 보라.
그러나 그 병자에게는 지난 38년 동안 참 안식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께 고침을 받은 순간 비로소 참 안식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참 안식을 찾은 그 순간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어겼다고 유대인들의 책망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하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셔서 그 사람을 곤란케 하고 자신도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한다고 하여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자초하신 것일까?
그러기에 예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안식의 참 의미를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어떤 성서학자는 베데스다 연못은 율법을, 다섯 행각은 모세 오경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잘못과 죄를 지적해줄 뿐이다. 율법은 베데스다 연못의 다섯 행각처럼 죄인인 줄 알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일 뿐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물에 의하여 고침을 받지 못한 38년 된 병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고침을 받은 것이라 해석한다. 지나친 상징적인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일면 통찰력 있는 지적이라 생각된다.
유대인들은 고침을 받은 병자와 병을 고치신 예수님이 함께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38년 된 병자이기 때문이다. 38년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한 자들이 바로 자기들의 조상임을 알면서도 깨달음이 없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사 필경 다 멸절되었느니라”(신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시작된 광야생활 38년은 쉼도 없고 기업도 없는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죄값을 치렀지만 참 쉼을 누리지 못하여 병이 깊은, 38년된 병자 이스라엘을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심으로 치유하셨다.
역사는 반복되어 이제 그들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율법주의의 노예가 된 그들이 바로 38년 된 병자인 것이다. 그들에게 바로 예수님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순종은 유전인가?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그래서 치유받지 못하고, 쉼 없이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다.
역사는 오늘에도 반복되고 있다. 혹시 우리들이 바로 38년 된 병자로 다섯 행각 아래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인가? 아니면 다섯 행각 아래서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어떤 반칙을 하지 않을까 하여 감시하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어떤 자들이건 모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야 한다. 각자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참 안식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