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주의하라고 교훈하셨다(눅12:1). 위선이란 바로 ‘죄성을 가진 인간의 인간에 대한 태도’이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겉은 깨끗하게 치장했으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데서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법적인 의를 주장하나 진정한 공의와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에게는 섬김과 숭배의 대상이 되려고 하나 진정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고와 희생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바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내용들이다(눅11:37-54).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다. 위선은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서 자기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로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어 끝없이 자기를 위장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자가 진정한 자유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눅12:4).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란 ‘연약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태도’이다.
두려움은 광명하고 공개적인 곳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자기 목숨에 연연하여 구차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게 한다. 이상은 예수께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하여 지적하신 내용들이다(눅12:2-12).
사람을 두려워하면 바로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 때부터 자유를 상실하고 노예가 된다.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여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먼저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목숨을 해할 수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목숨과 함께 영혼도 멸하실 수 있는 분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큰 손 안에 보호받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진정한 자유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질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교훈하셨다(눅12:20). 물질에 대한 욕심이란 ‘죄성을 가진 인간의 물질에 대한 태도’이다.
물질을 더 많이 갖기 위하여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 관계를 파괴한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물질을 소유하는데 인생의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모두 소진한다.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데 인생의 최고의 의미를 둔다. 이상은 예수께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지적하신 내용이다(눅12: 13-21).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게 되면 바로 물질의 노예가 된다. 사람이 물질을 다스리며 선용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사람을 다스리게 하여 인간의 삶의 본질을 왜곡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의 창고에는 물질이 썩어가고, 가난한 자는 굶주려 죽는 비참한 세상을 연출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진정한 자유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눅12:29). 물질에 대한 염려란 ‘연약한 인간의 물질에 대한 태도’이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염려한다.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염려한다. 그렇게 염려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이상은 염려하는 자에 대하여 예수께서 지적하신 내용이다(눅12:22-34).
염려란 연약한 사람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물질에 대한 염려는 물질에 대한 욕심보다 심각하게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든다. 그래서 물질을 얻는 일에 인생을 소진하게 하고 또 물질을 쌓아두어 썩게 만든다.
염려를 극복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인식하여야 한다. 그는 창조주로 미물까지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사람의 필요를 다 아시는 분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자가 진정한 자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