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는 마라를 잊었을까?
나오미는 마라를 잊었을까?
구약성서 ‘룻기’의 주인공은 표제가 말해주듯 이방 여인 룻이다. 때로는 이야기의 초점을 주인공이 아닌 조역에 두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룻기의 조역, 곧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기쁨’이다. 누가 그녀의 이름을 지어 주었던 간에 그녀는 자기의 이름처럼 기쁨 속에 인생을 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녀가 태어나고 가정을 이루고 살던 땅에 든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를 알아 본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니냐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오미는 이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라. 마라 곧 고통이라고 부르라”고 자조적인 답변을 하였다.
나오미는 슬픔과 고통의 과거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따라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간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삶을 잃었다. 남편과 두 아들이 거기서 죽었던 것이다.
그들이 죽은 것은 흉년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내려 간 것이 죄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괴롭게 하셨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셨는가?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징벌인가? 그것이 죄에 대한 징벌이든 인생 자체가 지닌 시련의 결과이든 상관없이 지난날은 화석처럼 굳어진 것으로 다시 고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성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은혜의 자리는 거기서 시작된다. “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느냐”(룻1:20,21).
희락에서 고통으로 전락한 자리에서 비로소 일어나는 자기 성찰은 인간 특유의 오만과 자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겸허하게 들어가는 관문이다.
성별된 은혜의 자리는 지난날의 고통을 승화시켜 하나님의 섭리 속으로 인도한다. 그 섭리는 지켜질 수 없는 인간적인 희락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희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이 황혼에 걸려있는 때에 비로소 진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부 룻을 통하여 남편의 가계가 이어져 기업이 끊기지 않는 것이었다.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인간적인 경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생의 경륜이 하나가 되어 나오는 지혜에 따라 며느리 룻을 인도하게 되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기업 무를 자 중에 하나인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다. 그는 보아스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푸는 자로 알고 여호와께서 복 주기를 구했다.
그는 또 며느리 룻에게 안식할 곳을 찾아 복되게 하여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며느리 룻을 목욕시켜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혀 타작마당으로 보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맞이할 때 성중의 백성과 모든 장로들은 증인이 되어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해 주었다(룻4:12).
그리고 룻이 보아스의 집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을 때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라고 하였다(룻4:14,15).
이 아이가 바로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오벳이다. 그리고 오랜 후에 이 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 고통을 거쳐 성별된 나오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신 것이다. 아기를 품에 안은 나오미는 ‘마라’를 잊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