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갈대, 생각하는 갈대

입다의 딸은 죽어야만 했을까?

남전우 2012. 2. 22. 20:25

 

입다의 딸은 죽어야만 했을까?

 

이스라엘의 사사로 성경에 길르앗 사람 큰 용사라고 기록된 입다는 기생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사람이었다(삿11:1). 입다는 출중한 인물로 뛰어난 용사였지만 기생에게서 태어났다는 출생 신분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그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다. 입다는 그의 아버지 길르앗과 본부인 사이에 태어난 정실 자식들로부터 멸시와 박대를 받았고 결국 이복 형제들의 위협을 피하여 돕 땅에 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입다가 거하는 돕 땅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온갖 잡류들이 그에게 모여들어 그들은 함께 살았다. 아마도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지 않았다면 입다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한 생애를 마쳤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다에게 기회가 왔다. 암몬 자손의 침략 위협 앞에 놓인 길르앗 사람들에게는 큰 용사 입다를 불러 침략을 물리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 자신을 멸시하고 배척한 사람들의 머리가 되었을 때에 입다가 과연 그들을 향하여 마음속 깊이 품었던 원한은 모두 풀었는지, 또 기생을 어머니로 둔 출생의 열등감은 극복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일을 저지르고 잘못되면 그가 자라난 환경 등을 분석하며 그랬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등 입방아를 찧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 주인공 입다에 대하여는 편견은 갖지 말기로 하자.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다(삿11:29).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입다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사사임에 틀림없다.

암몬 자손을 치러 나가는 입다는 하나님께 “주께서 암몬 자손을 붙이시어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영접하는 사람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입다의 서원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가나안 땅의 이방종교 의식이다. 어느 누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생명을 번제로 바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자기의 생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입다의 잘못이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진행되어 입다가 이끈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을 크게 이기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입다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바로 가장 사랑하는 그의 무남독녀였다. 입다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그를 영접하였던 것이다.

이를 본 입다는 옷을 찢으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삿11:35)라고 부르짖었다.

이것이 바로 남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바치겠다고 한 잘못을 범한 입다에게 준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성별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정말 성별된 것인가? 많은 경우 하나님께 드린다는 당위성 때문에 그것이 성별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드리지는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것만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당위성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드리지는 않는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드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실까?

입다의 잘못된 서원에 대하여 바로 대답하셨다. 입다를 마중나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대답이다.

결국 입다는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돌이킬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입다가 올바로 깨닫기를 바라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