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두 번씩 두 번 떠났다.
모세는 두 번씩 두 번 떠났다.
모세가 가장 가고 싶어하며 그리던 곳은 가나안 땅이지만 그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경험된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장소는 애굽과 시내산일 것이다. 그는 애굽을 두 번, 시내산을 두 번 떠났다. 애굽과 시내산을 처음 떠날 때는 홀로 떠났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떠났다.
홀로 떠나는 길은 고독한 길이다. 그 고독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것은 소명으로 승화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홀로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함께 떠나는 일을 맡기시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함께 더불어 떠나는 길은 고독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또 다른 고통이 주어지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모세는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한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하였고 결국에는 그들로 말미암아 실족하여 그가 가고자 하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독, 그의 고통, 그의 그리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한마디로 모세는 이스라엘인이지만 바로의 공주에 의하여 길러진 이중적인 신분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이중성의 극복은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쳐죽이는 살인사건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더 이상 애굽에 머무를 수 없게 된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 앞에 길이 있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살 수 없었기에 무조건 도망친 것이다.
그때까지 그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었다. 고독한 긴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그는 시내산에 도착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거기서 그는 비로소 자기 스스로의 독백이 아닌 하나님과의 대화 가운데 자기자신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질문도 할 수 있었다. 소명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받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시내산을 떠나 애굽으로 향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떠났다. 이것이 모세가 두 번째로 애굽을 떠난 사건이다. 모세는 노예 생활 외에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던 산이 있는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19:1).
시내광야를 떠나기까지(민10:11,12) 일년간 그들은 그곳에서 머물렀다.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일년 동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가르침을 받고, 체계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애굽에서 떡반죽 그릇을 둘러메고 오로지 노예탈출이라는 일념에서 애굽을 떠날 때와는 달리 시내산을 떠날 때에 그들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목적지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모세의 두 번째 시내산을 떠남은 비교적 성숙한 공동체와 함께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지향적인 망령은 계속하여 모세에게 고통이 되었다.
지도자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없지만 그가 가진 고독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고 결국 그 고독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로 이끄는 것인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그를 지도자로 여기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지도자란 무엇일까? 변덕스러운 4월의 잿빛 하늘 아래서도 5월의 푸른 하늘을 꿈꾸며 쉬지 않고 열정을 뿜어대는 사람인가? 그 꿈과 열정 때문에 그가 받는 고통은 상쇄되는가?
또 지도자는 언제 그 자리를 물러나는가?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는가? 모세가 죽은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광야의 한 야산이었다. 가나안으로 백성들을 이끌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였다.
이제 우리는 모두 떠나야 한다. 홀로 애굽을 떠나는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임재함을 느끼며 홀로 시내산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소명과 함께…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떠나야 한다. 애굽을 그리고 시내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