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열정
야곱의 열정
야곱은 쌍둥이 형제인 에서보다 간발의 차이로 늦게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게 될 장자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타의에 의하여 규정지어진 것으로 소위 타고난 운명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운명적인 것들이 있다. 부모를 잘못 만났거나, 장애자로 태어났거나,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나라에 태어났거나 등등…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운명적인 굴레를 씌우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너무 어려운 문제로 여기서는 따지지 말기로 하자. 다만 야곱이 자기에게 씌워진 굴레를 어떻게 벗어났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야곱은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본능적으로 투쟁하였다(창25:22). 태어나면서도 먼저 나가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야곱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사람들에게는 부당하게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는 힘이 본능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감히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야곱에게는 운명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를 벗게 하는 힘이다.
열정에 불타던 야곱은 배가 고파 어쩔 줄 모르는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빼앗았다. 게다가 속임수를 써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인정하는 축복까지 받았다. 어리석은 에서가 얼마나 불쌍한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기로 하자. 다만 야곱의 열정을 높이 사기로 하자.
야곱의 열정이 강탈과 속임수로 표현되었기에 그는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하여 험난한 인생 길을 가게 되었다. 훗날 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을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라고 회고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열정이 불순하게 나타날 때 그것을 불 가운데서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야곱은 부모의 집에서 쫓겨나 밧단 아람의 삼촌 라반의 집에 가는 것으로 정화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야곱은 삼촌 집에서 종살이하면서 자신을 정화해 갔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그는 네 명의 아내와 열 명이 넘는 자식들과 함께 재물도 얻는다. 마치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자손들이 번성하고 또 애굽을 나올 때 재물까지 얻은 것과 같다.
아마 오늘에도 우리에게 이 원리는 같은 것 같다. 영적인 결핍을 운명적으로 갖고 태어난 인간은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본능적인 열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열정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것이다. 그 열정으로 하나님을 소유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성화되어야 한다.
그 성화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하여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그 축복으로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기간 중에 야곱은 자신이 부당했던 것과 같이 부당함을 당하면서 종처럼 고되게 일을 했다. 떠나온 고향집과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네 여자와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야곱의 순수하지 못한 생의 열정이 결정적으로 정화된 일은 얍복강가에서 일어났다. 간교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빼앗아 원수 사이가 되어버린 에서를 다시 대면하는 일을 앞에 두고 홀로 남았다. 언제나 마지막 투쟁은 홀로 하는 것이다. 가장 고독한 자리다.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야곱은 밤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하였다. 야곱의 열정을 꺾지 못한 그 사람은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제 야곱의 육신은 쇠했지만 야곱은 영적으로 축복을 받기 시작하였다. 야곱은 처음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가진 장자권의 가시적인 열매다. 마침내 야곱이 가졌던 열정의 순수하지 못한 부분은 정화되었다. 그리고 에서의 용서도 받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의 열정의 순수하지 못한 부분이 마지막으로 정화되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그 외로운 자리는 어디인가? 십자가 바로 밑에 그 자리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