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6장 개요-하나님 중심의 삶

남전우 2011. 6. 3. 07:01

 

마6장 개요-하나님 중심의 삶

 

산상의 말씀(마5-7장) 본론(5:17-7:12)의 두 번째 주제는 ‘하나님 중심의 삶(6:1-34)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두거나 물질을 먼저 두게 될 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삶이다. 6:1-18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앞에서 자기 의를 나타내려는 세 가지 종교적인 위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6:19-34는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의 삶이 아닌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삶>

인간 앞에서 의를 나타내는 종교적 행위로는 세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고 있는데 ‘구제’(2-4절), ‘기도’(5-15절), ‘금식’(16-18절)이다. 유대인의 종교적인 행위 중에 이 세 가지는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항목에서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4, 6, 18절)고 말씀하여 이 세 가지 행위는 사람 앞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자들은 위선자들(2, 5, 16절)이며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선(외식)자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연극배우’이다.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13번이나 쓰고 있다. 연극배우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분다.

구제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강조적인 표현으로 중동 사람들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왼손과 오른손의 관계로 표현했다. 결국 가장 친하고 가까운 사람도 모르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다. 구제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그 정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기도 역시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하는 위선적인 기도를 책망하고 있다.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부가해서 이방인들의 기도처럼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중언부언하는 잘못된 기도를 공박하면서 모범적인 기도로 주기도문을 제시한다. 14, 15절은 또 다른 부가적인 가르침으로 기도에 앞서 형제를 용서할 것을 말한다. 사실 이것은 위선적인 것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지만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와서 왜 당신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가 하고 질문한 것(마9:14)을 보아도 당시에는 금식이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속죄일 같은 특별한 날에 금식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월요일, 목요일 등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였다. 문제는 금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고 칭찬과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위선적인 데에 있는 것이다. 금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워 자신을 성찰하는 자기 퇴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금식하는 자는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감출 것을 가르치고 있다.

 

<물질 중심의 삶>

하나님을 떠난 물질적인 추구에 대하여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늘에 쌓는 보물과 땅에 쌓아둔 보물(19-21절)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재물(22-24절) 그리고 세 번째는 믿음과 염려의 문제이다(25-34절). 그러나 이 전체의 주제는 한 가지로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이다. 첫째는 죄성을 가진 인간의 본능적인 물욕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물욕에서 오는 물질의 노예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났다고 본다. 그러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물질의 노예가 되는 더 심각하면서도 잘 인지하기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다룬다.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는 두 가지 경우 중 다른 하나는 염려 때문이다.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가? 내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의 미래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이다. 더 나아가 자신뿐 아니라 가족 등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염려다. 이러한 염려는 결국 미래를 위하여 오늘 재물을 쌓아 두게 만든다. 그래서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게 만든다. 결국 제자들이 물질에 대하여 가장 경계할 요소는 물욕 보다는 생에 대한 염려에서 오는 물질의 노예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다른 표현인 것이다. 공중의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사람들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하루 있다가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결국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다. 그리고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를 키울 수 없는 인간, 즉 미래에 대하여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인간임을 자각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