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소경 이야기 / 마20:29-34
마태복음 20장 29절에서 34절까지
여리고 소경 이야기
결국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큰자인가’라는 논쟁의 결말은 여리고 소경의 사건으로 종결지어졌다. 결국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 눈을 떠야만 진리를 보게 되고 비로소 그 진리를 좇게 되는 것이다.
가시적인 세상이 소경에게는 닫혀져있다. 정상적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것들에서 제한을 받고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소경들의 가장 큰 소원은 눈을 뜨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소경에 대하여 아홉 번 정도 언급하였다. “그 날에 어둡고 컴컴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그 때에 소경이 눈이 밝을 것이며”(사35:5)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7) 등의 말씀이 그것이다. 특히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벙어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43:8)는 말씀은 육체적 소경을 넘어서서 정신적인, 영적인 소경에 대하여 말한다.
육체적 소경을 고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경을 고치는 분으로 예언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유대인들은 소경을 고치고 벙어리를 고치시는 분은 메시아로 믿었다. 그래서 고침을 받고자 예수님 앞에 나온 소경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예수님은 두 명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다섯 개의 떡 사건 직후에 벙어리를 고쳐 주셨고 그 후 일곱 개의 떡 사건이 있은 직후, 가이사랴 빌립보의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직전에 벳세다 광야에서 어떤 소경을 고쳐 주셨다(막8:22-26). 그리고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유대지경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여리고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 주셨다. 요한복음은 소경 바디매오의 사건을 자세히 서술한다(요9장). 이에 비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여리고 소경의 사건만 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모아놓은 8장과 9장의 끝머리에 두 소경을 고치신 것과 벙어리를 고치신 것을 간단히 언급한다. 그리고 20장 끝에서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고치신 것을 간단하게 기술한다.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언급한 벳세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상징한다면 여리고 소경이 눈을 뜬 것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지셔야하는 십자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지어야할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의 제자들의 고백 이후 세 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고하시며 가르치신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신 여리고 소경은 예수를 좇았다(마20:34). 그가 좇은 길은 바로 십자가로 향했다.
<나의 묵상>
나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원하며 또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원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버렸지만 다시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과 천국에서 보상을 이 세상적인 것으로 오해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다시금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여리고 소경처럼 그것을 보고자 하는 소원으로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외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온전히 좇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