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예수님 / 막7:31-37

남전우 2011. 1. 5. 02:27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예수님(막7:31-37)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7: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7: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7: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7: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다섯 개의 떡 사건으로 시작하여, 바다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 손 안씻고 먹은 떡 논쟁, 부스러기 떡 이야기 등으로 이어진 일련 사건들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님이 '에바다' 하시며 고쳐 주신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에언대로 메시아가 오시면 소경과 귀먹어리, 벙어리를 고쳐 주실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심은 메시아적 이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애써 부정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적대자들은 눈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애써 부정하였다. 그러나 소경들은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갈 때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라 외치며 자신들을 고쳐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마가는 에수님이 다섯개의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무리들에게 주셔서 배부르게 먹고 열 두 바구니나 남겼던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한다. 바로 바람을 인하여 괴롭게 노젓고 있는 자신들에게 물위를 걸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여 소리질렀던 것이 그 이유 때문임을 지적하는 것이다(막6:52).

 

그리고 손 안씻고 떡을 먹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에수님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비유로 가르치셨다.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질책하시고 그 비유를 다시 풀어 설명해 주셨다(막7:18).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이다. 반면에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 앞에 나온 이방의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결국 귀먹고 어눌한 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영적으로 귀먹었기에 영적인 진리를 들을 수 없어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 없기에 열적인 진리에 대하여 올바르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가에 이르자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왔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양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하셨다. 이런 일련의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은 마가복음에서 벙어리와 소경을 고치실 때만 언급되고 잇는 점은 흥미롭다. 그리고 에수님의 탄식돠 가슴속으로 전해지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쩌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성육신의 진리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귀먹고 어눌한 자는 귀가 열리고 혀에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바로 진리에 대하여 귀가 열리고 그에 따라 진리를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제자들의 모습이 그 안에서 읽히는 것이다. 에수님은 귀먹어리도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하게 하시는 분 곧 그리스도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