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행전

예수를 좇음 / 눅18:35-19:10

남전우 2010. 12. 13. 06:04

 

예수를 좇음(눅18:35-19:10)

 

(18: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18: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18: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18: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8: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8: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18: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8: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8:35-19:10의 키아즘적 대칭점 구절은 눅9:57-10:20이다. 내용은 예수님을 좇는 동기의 순수성의 문제와 좇는 자의 우선순위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 중에 앞서 보낸 70인의 사역자를 선택하여 임무를 행하게 하는 내용이다. 
본문 눅18:35-19:10은  예수께서 자기를 좇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치신 후 여리고에서 소경을 고쳐주신 사건이다. 눅19:1-10은 누가만의 것으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게 되는 내용이다. 눅9:57-10:20과 눅18:35-19:10은 예수를 좇는 자들의 조건, 임무, 각성 등에 대한 것이다.

 

본문 눅18:35-19:10의 두개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 이후에 예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십자가를 가르치셨으나 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전제로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좇는 자, 심지어 사역자로 선택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자라도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닫고 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누가는 아직 제자들에게 십자가가 숨겨져 있었기에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주심으로(눅24장), 또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여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은 말할 것도 없이 영적인 눈을 뜸으로 새로운 것을 보게 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관복음 모두가 이 점에 있어서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보게된 소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았다.

눅19:1-10은 누가복음만의 것이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여리고의 소경과 같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소경은 볼 눈이 없었지만 삭개오는 볼 눈은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볼 수 없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볼 눈이 없는 소경은 예수님의 치유가 있어야만 한다. 삭개오의 사건의 메시지는 여기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볼 눈을 가진 자로서 키가 작은 것은 자기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삭개오는 스스로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대면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은 그의 집에 유하게 되신 것이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의 변혁에 대한 의지를 예수님 앞에서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임한 것을 선포하셨다.

예수를 좇는 자가 에수님의 십자가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삶에 대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은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결단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본문은 이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수님을 좇는 것은 동기의 순수함으로 시작되고 좇는 자의 삶의 우선순위는 영적인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좇는 자 중에서 선택하여서 임무를 맡기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좇는 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결국 그가 누구인지를 고백하게 된다. 그러한 고백을 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르치시고 또 그들이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